[글로컬 와인 스토리] 6편. 보르도 와인이 불러온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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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23년 콜라블의 정한호 대표가 강원일보에 기고한 '글로컬(Global+Local) 와인 스토리'의 연재 시리즈입니다.


🍷 글로컬 와인 스토리

1편. 강원도 로컬 음식과 와인의 환상적인 페어링 (23.2.10)

2편. 강릉의 와인 글로컬라이제이션과 새로운 가능성 (23.2.17)

3편. 사업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와인 에티켓 (23.3.3)

4편. 당신의 비즈니스를 성공으로 이끌어 줄 와인 이야기 (23.3.17)

5편. 중요한 식사 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와인 이야기 (23.3.31)

6편. 보르도 와인이 불러온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23.4.21)

7편.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의 숨겨진 이야기 (23.5.19)

8편. 슈퍼 투스칸. 이탈리아 프리미엄 와인의 상징 (23.6.23)

9편. 빈티지에 숨겨진 와인 품질의 진실 (23.7.21)

10편. 와인은 환경 파괴의 주범? (23.9.15)

11편. 프렌치 패러독스. 와인과 건강의 상관관계 (23.10.6)

12편. 삼복더위를 달래줄 여름 음식과 와인 페어링 (23.11.24)




6. 보르도 와인이 불러온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지난해 말 열린 카타르 월드컵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바로 영국과 프랑스의 8강전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국가는 전 세계 축구팬들을 잠 못 들게 만들었는데,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날의 경기가 단순한 월드컵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과거 백년전쟁(1337~1453)이란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들어봤어도 이 긴 전쟁의 서막에 보르도 와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오늘은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 중 하나인 보르도를 중심으로 백년전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땅을 잃고 부와 명성을 얻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과거 프랑스 보르도 지역이 하루아침에 잉글랜드 영토로 넘어간 사건이 있다. 1152년, 당시 보르도 지방에 위치한 아키텐 공국(Duché d'Aquitaine)의 공주였던 알리에노르(Aliénor)가 잉글랜드의 왕족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영주였던 앙리 플랑타쥬네(Henry Plantagenet)와 재혼을 하며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관습에 의해 아내가 된 알리에노르는 결혼 지참금의 형태로 보르도 땅을 남편 앙리에게 제공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보르도 지역은 하루아침에 잉글랜드의 소유가 되어 버린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귀족 가문과 결혼으로 연을 맺으며 프랑스 내의 영토를 얻는 일이 빈번했고, 이를 통해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국정 운영의 수입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영토를 뺏기는 것도 불쾌한데, 보르도 지역에서 와인 수출을 통해 얻던 막대한 세금까지 잃게 되자 서서히 전쟁의 불씨가 퍼지기 시작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보르도 지역은 비록 자국의 영토는 빼앗겼지만, 와인 수출읕 통해 막대한 경제적인 부를 이루게 되자 오히려 영국으로의 귀속을 반기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오랜 기간 통일 국가로 살아온 한국인의 입장에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국가관이 강하지 않던 당시 시기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주로 파리의 왕가나 귀족들이 소비했는데, 보르도는 프랑스 남서쪽에 위치한 탓으로 수도 파리까지의 물리적인 거리가 아주 멀었다. 더군다나 와인 운송 과정에서 부과되는 세금의 종류도 많아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보르도가 잉글랜드의 소유가 되면서, 보르도 와인 판매상들은 면세와 독점 판매의 혜택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자신들의 와인을 잉글랜드 및 인근 국가로 수출하며 큰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 이때를 계기로, 잉글랜드는 보르도 와인의 최대 소비국이 되었으며, 와인에 있어서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인들로부터 그 품질까지 인정받으며 보르도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가 된다.


#2. 영국-프랑스 백년전쟁(1337~1453)의 서막

당시 산업에서 와인 수출은 국가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잃은 프랑스 왕실은 단단히 칼을 갈게 된다. 비유하자면,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을 하루아침에 이웃나라에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프랑스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키고 싶었겠지만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의 왕 샤를 4세(Charles Ⅳ, 1294~1328)가 사망하면서 두 나라의 사이는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다. 샤를 4세는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게 되는데 이것이 사건의 단초가 된다. 당시 누가 프랑스의 왕위를 이을 것인가를 두고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6세(Philippe Ⅵ)가 후보로 나오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Edward Ⅲ)였다. 에드워드 역시 프랑스인의 피가 있었기에 혈통이나 족보 상으로는 오히려 후계자로 더 적합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왕이 프랑스의 왕까지 겸한다는 것은 당시 프랑스 귀족과 시민들에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잉글랜드의 왕은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위는 필리프 6세가 차지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필리프 6세는 자신의 자리를 넘본 에드워드 3세에 대해 분노심을 갖게 되고, 이에 대한 일종의 징벌로써 잉글랜드 왕실이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 내 토지들을 모두 몰수하고자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당시 잉글랜드에게 있어서 보르도가 포함된 기옌(Guyenne) 지방은 굉장히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 발생되는 수입보다 기옌(Guyenne) 지방에서 와인 수출로 인해 발생하는 수입이 훨씬 컸다고 할 정도이니 그 중요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기옌 지방을 프랑스가 다시 가져간다고 하니,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 이렇게 잉글랜드가 노르망디로 출격하며 전쟁이 시작되고, 이는 1337년부터 무려 116년간 이어지다 막을 내리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의 활약에 더불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3. 적장의 이름으로 와인을 마케팅하다. 샤또 딸보(Château Talbot)

샤또 딸보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와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16강 진출을 확정한 후 히딩크 감독이 “오늘 밤은 와인 한잔 마시고 푹 쉬고 싶다.”라고 말한 뒤 마신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지금 이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도 이미 알고 있거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 같다. 이에 반해, 이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의 이름 샤또 딸보에서 ‘딸보(Talbot)’라는 명칭이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와 전투를 벌이던 잉글랜드군의 총사령관 존 탤벗(General John Talbot)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프랑스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가 왜 적국의 장수 이름을 따서 와이너리명을 짓게 되었을까? 이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현재 샤또 딸보 와이너리가 위치한 곳이 영국 총사령관 존 탤벗이 사령관으로서 주둔하던 주둔지이다. 둘째, 백년전쟁 막바지에 카스티용(Castillon) 전투에서 전사한 그를 두고 많은 주민들이 슬퍼하며 경의를 표했을 만큼 평소 마을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던 인물이었다. 셋째, 보르도 지역이 잉글랜드의 소유일 당시 보르도 와인 판매상들은 면세와 독점 판매의 혜택을 받으며 부를 쌓을 수 있었는데, 보르도가 프랑스의 땅이 되면서 프랑스 정부는 전쟁 자금 등을 이유로 판매상들에게 큰 세금을 걷게 되었고, 이에 대해 판매상들은 프랑스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넷째, 보르도 사람들이 만드는 와인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소비자는 프랑스 정부나 상류층이 아닌, 잉글랜드인들이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겠다. 


아마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재 와이너리가 자신들의 이름에 ‘딸보’라는 명칭을 쓰고 싶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샤또 딸보의 성공사례로 보자면 적장의 이름이라도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과감히 사용할 수 있는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 관용) 정신. 다가오는 글로컬 시대에 우리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정한호 | 콜라블(Collabl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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